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말씀과 묵상

230528_신전에서 신상으로 살아가기(의미,품격,아름다움)_김학철교수님 본문

신앙생활/교육, 세미나

230528_신전에서 신상으로 살아가기(의미,품격,아름다움)_김학철교수님

NAMU. 2023. 12. 24. 22:38

230521_주일설교

신전에서 신상으로 살아가기(의미,품격,아름다움)_김학철교수님

 

-

이 세상의 진실 중 하나는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고통이 기쁨보다 크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먹는자의 기쁨과 먹히는 자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어느 것이 큰가?

 

이 세상엔 고통이 가득하고,

인간이라는 존재는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권태가 찾아온다고 한다.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세상을 두고 여러 해석이 오가는데,

그 중 하나는 세상이 열등한 창조주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상의 하나이며, 실제로 데미 후르고스라 하는 열등한 창조주가 등장한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감옥이라 말한다.

우리의 본질은 영혼이지만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느끼는 필요와 고통은 사실 모두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워하라고 강조하는 효자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한다.“

(김학철 교수님의 어느 스승의 말)

 

고통, 권태가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세상에 대한 달관을 이야기하는 종교, 사상이 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고 하찮은지 생각해보라.

어제는 한 방울의 정액이요, 내일은 한 줌의 재다.

그러므로 자연이 명령한 대로 지구상에 이 덧 없는 순간들을 보내라.

그리고 올리브 열매가 때가 되면 낳아 준 대지를 축복하고

생명을 준 나무에 감사하며 떨어지는 것처럼 기꺼이 안식을 취해라.“(아우렐리우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가?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인생은 반복- 맴돌이지다.

태어나고, 애 낳고, 죽는다.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돌을 애써 굴려 정상에 올려도, 금방 떨어지고 또 다시 굴려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생존 이상의 품격을 가질 수 있는가?

삶은 아름다운가?

 

서양 철학자들이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를 다루기 시작한건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거기선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관련해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인생의 목적을 주고,

우리가 그 목적을 성취할 때 인생은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기엔 어렵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다.

 

우리들 중 대다수도 사실 잘 모른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

그걸 모를지라도 기독교, 기독교 신앙, 성경은

삶의 의미와 품격, 아름다움을 말해줄 수 있는가?

 

-

 

기독교 신앙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는 건

우리 삶의 의미와, 품격과,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혜와 생각의 자원을 준다.

 

01. 의미있는 삶이 가능한가? -

기독교 성서는 신앙이 의미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통도를 가지고 있다.

 

의미있는 삶이란?

삶을 지속하게 하는 가치를 실행하는 삶이다.

 

왜 사는가? 라고 묻는 질문에

나는 이것을 해야 하고, 그것이 가치 있고,

그래서 나는 삶을 지속 할 이유가 있어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는 어디서 구현되는가?

창세기 1-2장에 인간 삶의 의미의 구현에 대한 지혜가 있다.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성부 하나님의 창조에 담긴 의미를 본 받는 것.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건

Chaos-혼돈, 어둠, 끝을 모르는 깊음, 공허함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자들이 공통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 우리가 발 딛는 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깊은 구덩이 같아서

도저히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광야와 같다.

삶의 고통, 무의미, 허무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는 광야의 이야기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거기에 빛이 있으라고 한다.

바다에 경계를 세워 땅을 드러낸다.

바다의 한계를 정하고, 나무와 풀이 태어나게 하고, 동물을 꽃 피우고,

마침내 자신과 창조행위를 같이 할 파트너를 만든다.

신과 더불어 창조를 같이 할 파트너는 인간을 말한다.

 

가치란 무엇인가?

혼란스러운 세상과 자기 삶에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다.

어둠에 있어 분별하지 못했던 것들에 분별을 주고

공허함 속에 생명을 내고, 깊음에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이는 개간지에 밭을 일구는 농부와 같다.

 

삶에, 세상에, 혼돈 가운데 질서를 주고,

학문을 통해 무지의 영역에 지식을 가져다 준다.

위험이 몰려오지 않도록 깊음에 한계를 지어준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닮아가는 것에서 가치가 생기고

이는 삶에 의미를 선사한다.

 

그러한 깨달음은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작동한다.

신의 창조행위는 인간 노동의 원형이다.

노동이란? 만들고 기뻐하며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기의 미적 이념을 실현하는 예술품으로 만들고,

인간을 이에 동참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력을 팔게하는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

 

주체적, 기획적, 주도적으로

노동을 통해 나를 실현하고 생명의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로써

특별한 스펙을 쌓은 기계부품처럼

대체가능한 존재로 노동력을 팔며 노동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비판 할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노동과 노동력을 파는 행위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삶을 구현하게 하는 노동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노동을 해야 할지,

우리 삶에 어떻게 의미를 구현할지 깨달을 수 있다.

 

스펙(SPEC)은 물품의 재질, 규격 등 상품의 특징을 적혀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상품으로 사달라고 해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의미가 왜 우리 삶에 발생하지 않는지, 어떻게 해야 의미가 발생하는지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전통에서 배울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기독교 신앙의 성부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연관되어있다.

 

-

 

02. 품격있는 삶은 가능하게 하는가? - 기독교 신앙은 품격을 가능하게 한다

 

품격 : 그 사람의 바탕, 성품, 인격이 사람들을 감화하는 성질

기독교 신앙은 품격있는 사람을 만들고, 품격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품격을 부러워한다는 건 질투와 다르다.

우리가 좋은 아파트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을 보며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인채로 그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품격은 그 사람 자체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만들고

이는 사람을 생존한 이상의 존재로써 살게 한다.

 

품격은 어디서오나? 희생과 헌신에서 온다.

이는 나보다 큰 무엇을 위해 기어이 희생할 수 있는 성질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좁은 자신을 극복한 사람이다. 그들에겐 품격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집중된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을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권력, 성공, 외모에 대해 장기간 생각하고,

타인을 이용, 오용, 남용하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된다.

그들은 타인을 비난하고, 괴롭히고, 깎아내린다.

좁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이질 하고 있다. 그들에겐 품격이 없다.

 

품격은 나를 넘어서는 보다 아름다운 것을 향한 품격에서 온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성자 예수의 십자가 신앙이라고 부른다.

(의미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지올팍의 크리스찬이라는 노래에서,

돈과 성관계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하면서도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역겨운 인간이라며 구토를 한다.

거기에 지올팍은 너희는 거짓말쟁이인 너희 자신을 숭배한다며 어처구니 없어한다.

자기 자신을 숭배하며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너희들이 나와 무엇이 다르냐며

그 사람들에게 구토를 한다. 결국 서로 역겨워서 서로에게 토하는 내용이다.

 

품격은 좁은 나를 벗어나서, 보다 큰 것 이를테면 학문이나, 가정 같은 것을 향한 헌신과 희생에서 온다. 그리고 이를 심도있게 보여준 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성격은 말한다.

 

 

 

품격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벗어나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헛되고 부조리하지 않다고 믿고 절망하지 않는데서 품격을 가질 수 있다.

 

나는 공중을 향해 화살을 쏘았지만,

화살은 땅에 떨어져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네,

 

너무 빨리 날아 눈이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

 

 

나는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불렀지만,

노래는 땅에 떨어져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네,

 

아무리 날카롭고 강한 눈이 있어도,

날아가는 노래를 어찌 쫓을 수 있겠는가?

 

 

아주 오래 지난 후에, 나는 참나무 속에서

화살을 찾았네, 아직 부러지지 않은 그것을,

 

그리고 노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구의 가슴속에 있는 것을 다시 찾아냈지

 

(롱펠로우 - 화살과 노래)

 

우리가 하는 헌신과 희생의 노래는

다 날아가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지만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아서 계속 불리는 노래가 될 것이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한 면이라고 말한다.

 

희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에 자리잡고 앉아서 가사 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

 

희망을 가진 사람을 지옥에서 살지 않는다.

지옥에서 사는 사람은 어떠한 희망도 바랄 수 없는 사람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문 앞에

여기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희망을 버려라라고 써있는 것처럼 말이다.

 

품격 있는 삶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이라고 정리 할 수 있다.

 

-

 

03. 의미와 품격을 추구하며 아름다움 삶이 가능한가?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품격을 추구하는 삶이

아름다움으로 현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미대 교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고생하고 애쓴 흔적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면 안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의미있는 삶을 살려고 애쓰고, 품격있는 삶을 살려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생긴

분투와 애씀의 상처, 주름살, 트라우마가 드러나지 않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예술가들은 그런걸 하는 사람이다. 고생한 티가 작품에 드러나선 안된다.

사람이 궁하면 나타나는 자세나 마음의 상처(궁끼)가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천의무봉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적으로 하늘의 옷은 바느질한 흔적이 없다는 뜻이다.

꾸미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섬세한 아름다움이 극치에 닿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것이 성격이나 언행을 볼 때, 그 사람이 참 자연스러운데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사려깊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다.

배려 받았음을 나중에는 알지만 당시엔 자연스러워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로 타인을 상처 입히며 살아간다.

가장 좋은 예가 꼰대다. 그들은 항상 나 때를 이야기한다.

상처를 드러내고 사는 삶을 아름답지 않다.

 

의미있는 삶, 품격있는 삶을 살려고 몰두한 나머지

자기희생과 금욕에 몰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되어버리는 역설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기 부정의 삶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다

자신은 희생하고 있는데 남들이 자신을 적절하게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 억울함을 더 높은 기준을 서로에게 요구하고,

기준에 미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고 욕설을 퍼부음으로써 해소한다.

 

또한, 억울함은 자기주장에 충분한 근거를 대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론적 오류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기 부정의 삶은 따르는 사람들은

명예를 통해 자기를 입증하는 것 외에 가치를 경험할 수 없다.

(이한 교수-삶은 왜 의미 있는가)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 품격있는 삶, 의미있는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존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실제로 그런 체험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성령 하나님의 임마누엘 신앙이라고 부른다.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나와 동행하시고 나와 함께하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하시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영으로 창조를 함께 했다.

그래서 창조의 과정이 수고와 지루함이 아닌 감탄이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실현이 된다.

 

창조의 결과를 두고 하나님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하신다.

그것은 성령이 그 의미 있는 노동, 곧 창조에 함께했다는 뜻이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함께 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삶의 과정이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울이 대표적인 예다.

 

성경을 보면 고생을 참 많이 했음에도 갈라디아서 520-23절을 보면

성령이 함께하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고 어려운일 당해도 인내하고 서로에게 친절하고 다른사람에게 신실할 수 있고 온유할 수 있고 절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임마누엘 신앙(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

 

-

 

기독교인들이 믿기에 이 세상은 열등한 창조주의 감옥도 아니고 열등한 피조물도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파트너, 그의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살아간다는 의미다. 고대에서 이는 신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지구는 신이 머무는 신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전인 세상에서 신상으로 살아간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삶의 의미, 품격, 아름다움이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는다.